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위 계승의 법칙 (문단 편집) ==== 태자밀건법 ==== 太子密建法 중국 [[청나라]] 시절 [[옹정제]] 이후 사용된 왕위 계승 방식. 황제가 생전에는 황태자를 공표하지 않고 그 이름을 써서 건청궁(자금성의 침전겸 편전)의 옥좌뒤의 순치제가 쓴 정대광명이란 현판에 밀봉해 두었다가 황제 사후 이것과 내무부의 밀지를 맞추어 다음 황제를 지정하는 방식이다. 청은 3대 [[순치제]] 때까지는 전통에 따라 바일러들이 선황의 자손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를 추대하는 선출제의 방식으로 계승을 하다가 4대 [[강희제]] 때 와서 중국의 장자 상속의 원칙을 도입하지만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어서 태자는 자질 문제로 여러 차례 폐위, 복위를 반복했고, 강희제의 치세 말기는 차기 제위를 둘러싼 여러 황자들 사이의 파벌 싸움으로 혼란스러웠다.[* 황태자는 효성인황후 허셔리씨의 아들인 2남 윤잉이었으나 적장자 전통이 익숙하지 않아서 다른 황자들이 그를 시기했고 황장자당,황태자당,황4자(옹정제)당,황8자당으로 나뉘어 다투니 윤잉은 점점 일에 소홀해지다가 비뚤어진 뒤 폐위되어 연금된다. 서장자 윤제는 윤잉을 저주하다 걸려 같이 연금당했고 다른 황자들과 대다수 대신의 지지를 얻은 8황자 염친왕 윤사 vs 13,16,17 황자와 소수의 대신들의 지지를 얻은 4황자 옹친왕 인전이 대립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즉위한 5대 옹정제는 황태자를 일찍 정해버리면 황태자가 교만해지고 그를 둘러싼 파벌이 형성될 것이라 지적하며 위와 같은 방식을 도입한다. 이 방식의 장점은 첫째로 황제의 아들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을 택할 수 있고, 둘째로 야심 있는 황자들이 모두 제위를 얻기 위해 능력을 닦겠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날 행동은 할 수 없으니 권력 다툼이 억제되며, 셋째로 황제 사후 제위를 둘러싼 친족이나 환관의 농간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다만 이 방식을 쓰려면 황제가 매우 강력한 황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고 난 뒤 선황의 유언 따위는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제위가 엉뚱한 곳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급사했거나, 결정했더라도 나중에 과실이 있어 바꿔야 하는데 미처 그러지 못 하고 죽었다면 대혼란이 일어난다. 거기에 황제의 모든 아들들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제위 계승을 위해 레이스를 하는 상황이라 그들 중 누군가가 승자가 된다 해도 탈락한 황자들의 야심 + 그들이 구축한 세력을 다음 황제가 감당해야 한다. 차라리 계승자가 정해져 있다면, 암투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진작에 포기하거나 황태자에게 달라붙어 그의 친위세력이 되거나 할텐데 모든 황자에게 계승 자격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달려보지 않겠는가? 다만 아래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경우엔 누가 후계자가 될지 온 동네가 다 알고 있었다.''' 또 청나라는 황자들에게 다 친왕직을 주지는 않았고, 황제의 총애나 업무 능력에 따라 화석친왕-다라군왕-다라패륵-고산패자로 나뉘는데 건륭제 때를 빼고 옹정제 때부턴 황제의 아들 중에서 단 1명만이 화석친왕에 임명되었다. 그러니 정작 청에서 온전하게 이 방식으로 제위가 계승된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옹정제가 이 제도를 창안한 이후 제위를 계승한 황제들은 다음과 같다. * [[건륭제]]: 옹정제의 4남이지만 옹정제 사망시 위의 세 형이 이미 요절해 사실상 장남. 3남인 홍시는 건륭제의 후계 구도에 태클 걸다가 사망했다. 게다가 옹정제 제위 전부터 강희제가 옹정제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명령이 있었다. 누가 봐도 건륭제가 후계자임을 다 알 수 있는 상황. 앞의 내용이 건륭제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라고 할지라도, 옹정제의 자손들 중에 애신각라 홍력 이상으로 능력이 있는 이는 없었다. 건륭의 두 동생들은 모두 역량이 큰 형에 비해 아주 부족했었다. 아무리 옹정제가 태자 밀건법의 창안자긴 했지만, 후계자는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다. * [[가경제]]: 건륭제의 15남. 건륭제는 원래 적장자(나이 순서대로는 차남)인 단혜태자 영련(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소생)을 황태자로 밀건했지만 그가 일찍 죽자 역시 적자(7남)인 영종을 황태자로 밀건했다. 그러나 영종마저 죽고 후계자는 15년 이상이나 오리무중 상태였다. 여러 정황으로 추측컨대 건륭의 아들들 중 가장 먼저 화석친왕에 봉해진 5남 영기가 이 기간 동안 밀건되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기도 얼마 있지 않아 사망.[* 기록에 따른다면 건륭이 영기에게 황위 제안을 했으나, 영기 본인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건륭제는 생전에 자신의 아들 5황자 영기를 기억하기를 "군주의 별이 타고났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당시 건륭이 다음 황위를 영기에게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 결국 건륭제는 재위 60주년 되는 해에 15남인 가친왕 영염(가경제)에게 양위한다.[* 건륭제에겐 요절한 자식들과 양자로 보낸 자식들을 제외하면 8남인 영성과 11남 영성, 15남 영염, 17남 영린이 있었는데 8남 영성은 일처리를 못하고, 17남 영린은 술과 여자에 빠져살고 폭행을 일삼아서 둘은 포기하고 11남 영성과 15남 영염을 화석친왕에 책봉해서 일을 시켜봤는데 11남 영성이 문에 치우쳐 있어서 15남 영염이 후계자가 된다.] 밀건법으로 계승했다기보다는 그냥 황태자를 책봉해 양위한 것에 더 가깝다. * [[도광제]]: 가경제의 차남이지만 장남이 일찍 죽어 실질적인 장남이자 황후 소생의 적자. 게다가 계유지변에 공을 세워 도광제가 제위를 계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 [[함풍제]]: 도광제의 4남이지만 위의 형 셋이 일찍 죽는 바람에 도광제 사망시에는 사실상 장남. 게다가 유일한 적자(효전황후가 낳은 아들)이기도 했다. * [[동치제]]: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라 달리 대안도 없었다. * [[광서제]]: 동치제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방계에서 입양하여 계승. [[서태후]]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서태후의 시동생인 [[순친왕]]의 아들이었으므로 서태후가 공친왕의 아들을 제치고 함풍제의 양자로 삼아 계승하게 했다. * [[선통제]]: 광서제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광서제의 조카인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방계에서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황위를 계승했다. [[서태후]]의 애인(?)인 영록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지명되었다는 썰이 있다. 죽 살펴보았듯이 밀건법이 완전하게 적용된 예는 사실상 전무하다. 밀건법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장자가 아니라도 능력 있는 황자가 뒤를 이은 사례가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청나라 역시 적장자 원칙을 웬만하면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청나라와 [[만주국]]의 [[왕위 요구자|황위 요구자]]들도 사실상 한족식 적장자 원칙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에는 [[오만]]에서 계승 방법의 하나로 사용중이다. 왕실 협의회가 술탄 승하 3일 안에 후계자를 확정하거나, 술탄이 생전 남긴 서한을 따른다. [[2020년]]에 [[카부스 빈 사이드]] [[술탄]]이 승하했을 때도 술탄의 사촌인 [[하이삼 빈 타리크 알사이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술탄의 서한이 공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